용인예술과학대학교
웹툰만화과

일러스트_이우영 교수 作
<교수 인터뷰> 웹툰만화과 이우영 교수
2022학년도 용인예술과학대학교 웹툰만화과 교수로서 재직하게 됐는데 소회가 궁금하다.
오랜 시간 한 가지 일을 한다는 것은 어떤 이에겐 “멋지다. 대단하다”로 보일 수도 있다. 하지만 “재미없다. 도전정신이 없다”고 말할 수도있다. 나는 간혹 힘들다고 생각했지만 다른 일을 하겠다는 생각을 한번도 해 본 적이 없다. ‘나의 30년이 미련한 것은 아닐까?’하는 고민 중에 용인예술과학대학교를 만났다. 이곳 웹툰만화과에 입학할 학생들은 내 30년 전의 시점과 같이 만화를 사랑할 사람들이다. 나 역시 그들과 같은 시점에서 만화에 대한 사랑을 함께 하고 싶어졌다.
만화가로서 30년을 돌아볼 때 이 시간에 어떤 의미를 부여하고 있나
만화는 곧 나 자신, 이우영이다. 한편으로 나 스스로를 가족을 위해 직업적으로 만화를 그리는 생계형 만화가라 생각한다. 가족은 30년 동안 만화를 쉼없이 그릴 수 있게 해준 원동력이다. 솔직하게 가족보다 만화가 중요하다고 생각할 때도 많다. 누군가는 이기적이라고 생각할 수 있다. 하지만 만화는 내 역사고 자존감을 높여주는 유일한 벗이었다. 만화를 빼면 내 삶은 아무것도 남지 않는다. 그러니 만화에 대한 나의 애착은 30년이나 쌓인 만큼 불가항력적일 수밖에 없다고 생각한다.

만화를 시작한 계기부터 현재까지의 과정
초등학교 시절 만화책 보는 걸 좋아했다. 언제부터인가 맘에 드는 만화를 따라 그리기 시작했다. 그러다 보니 점점 만화 그리기에 흥미와 자신감이 생겼다. 이후 내가 직접 이야기를 만들고 만화를 그려보는 과정으로 발전했다. 이런 일련의 성장을 통해 행복했고 재미를 느꼈다. 그때부터 내 장래 희망란을 ‘만화가’로 적었다.
1991년 고3이었던 나는 진로를 정할 시기가 됐다. 하지만 만화가가 되겠다는 꿈을 도와줄 교육기관이 마땅치 않았다. 그래서 대학 진학을 포기하고 유명 만화가의 문하생이 되기로 결심했다. 시간이 지나 국내 최초의 만화 관련 학과가 공주대에 생겼다는 소식을 들었다. 망설이지 않고 도전했고 합격했다. 대학 1학년 겨울 방학에 대원 출판사에서 발행하던 주간잡지인 소년 챔프에서 제1회 신인 만화가 공모전이 열린다는 소식을 듣고 바로 응모했다. 이 공모전에서 우수상으로 입상해 이후 연재작가의 길에 들어섰다. 이 수상 한번으로 1992년 소년 챔프에 검정 고무신을 연재하게 된 것이다. 검정 고무신은 부모님 세대의 이야기다. 젊은 작가가 경험해 보지 못한 것들을 그림으로 옮기는 작업은 상상력만으로는 힘든 작업이었다. 발품을 팔아서 자료를 찾아 다닌 기억이 생생하다. 1995년 대한민국 만화대상 신인상을 수상했다. 이상은 내가 만화를 포기하지 않고 연재를 계속하게 해준 힘이 됐다. 물론 출판사로 배달되던 응원의 팬레터도 큰 힘이 되었다.
30년 동안 대표작인 ‘검정 고무신’을 시작으로 만화잡지 연재와 200권 가까운 단행본을 출판했다. 지금은 출판만화뿐만 아니라 웹툰 등 다양한 주제와 새로운 분야의 작업을 진행하고 있다. 또한 지역사회 학교, 도서관 같은 문화공간에서 만화와 관련된 인문학 강의를 하는 등 바쁜 나날을 보내고 있다.
‘검정 고무신 작가치곤 너무 젊다’는 사람들의 반응이 많다. 검정 고무신의 제작 과정을 간단히 소개 바란다.
그 시대 사람이 검정 고무신을 그렸다면 아무리 방부제를 먹었어도 지금은 꼬부랑 늙은이일테니 사람들이 나를 보며 놀랄만도 하다. 물론 검정 고무신을 혼자 그린 것은 아니다. 글 작가님이 따로 계셨고 나는 그림을 그렸으니 사람들과 소통하며 함께 만든 결과물이라고 보는 게 맞다. 사람들이 놀라는 점이 하나 더 있는데 고증에 대한 부분이다. 검정 고무신은 풍경, 분위기뿐만 아니라 사소한 물건이나 설정들이 모두 옛날 사람이 아니고선 표현하기 어려운 것들이다. 물론 나 자신이 필요한 이미지를 찾아 발품을 팔고 어른들 이야기를 직접 청취하면서 고증에 많은 신경을 썼다. 결정적인 도움은 부모님의 옛날 사진첩이 줬다. 마땅한 참고 자료를 찾지 못했을 땐 사진첩을 들춰봤다. 까까머리에 까만 교복을 입은 아버지 모습, 곱게 빗은 머리에 비녀를 꽂고 계신 할머니 사진 등 당시의 모습을 알려주는 좋은 자료가 됐다. 때로는 전차의 이미지를 구하고자 당시 작업하던 포천에서 서울역까지 여러 번 찾아갔다. 클릭 한 번이면 원하는 이미지를 얼마든지 구할 수 있는 지금을 생각하면 참 열역한 환경이었다. 하지만 그런 열정과 노력이 지금의 나를 만들었다고 생각한다.

만화가가 아닌 만화를 가르치는 입장이 됐는데 어떤 마음으로 학생과 만날 것인가.
나와 학생들의 세대가 서로 다름을 인정하는 것에서 시작해야 하지 않나 싶다. 현재 내 작업은 컴퓨터와 손그림을 병행하고 있다. 나는 꼰대를 거부하지만 만화를 그리는 일이라면 꼰대가 될 수밖에 없는 입장이다. 한창 활동하던 시기엔 디지털 컬러링은 고사하고 채색부터 먹선까지 전부 수작업이었으니 당연한 이치다. 수작업은 모든 과정이 자동으로 되는 것이 없다. 종이에 연필로 밑그림을 그리고 펜선을 입힌 다음 밑그림을 지우개로 지우고 커터로 톤을 붙인다. 이 과정이 끝나면 말풍선에 대사를 다시 잘라서 붙인다. 지금 학생들에게 이런 작업방식은 어울리지 않다고 생각한다. 그럼에도 일본을 비롯한 많은 국가에서 아직 수작업과 디지털 작업을 함께 배운다는 건 생각해볼 만한 점이다.
내가 수작업이 불편하지 않듯 지금 젊은 세대는 디지털 작업이 불편하지 않다. 그 간극이 커보이지만 만화라는 큰 틀에서 서로가 가까워지기 위해 노력한다면 그 자체만으로 좋은 교육이 될 것이다. 만화는 재밌어야 한다는 것이 나의 철학이다. 학생들도 재밌는 만화를 그리는 것을 목표로 함께 나아갈 것이라 믿는다.
앞으로 용인예술과학대 웹툰만화과에 입학할 학생들에게 전하고 싶은 말이 있다면?
용인예술과학대 웹툰만화과에서 30년 전의 나처럼 만화를 사랑하는 학생들과 만나면 나는 준비돼 있을까? 나는 부족한 것이 많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내 주변 사람 중 가르치는 것이 업이 된 사람을 봤을 때 그것은 내 길이 아니라고 믿었다. 이제부터 마음을 바꿔서 긴 시간 만화가로서 내가 가지고 있는 기술을 바탕으로 새로운 시대에 맞는 후배 만화가들을 돕고 싶다. 가르친다는 표현보다 돕겠다는 표현이 어울린다. 나는 배운다는 자세로 학생들을 만날 것이다. 늘 혼자 고민했던 작업을 학생들과 함께 공유하고 고민하면서 그들이 새로운 상상을 하도록 돕고 싶다. 만화가 그리고 싶어서 달려온 학생들에게 맘껏 창작할 기회를 주고 싶다. 격려와 도움을 주는 선생이 되고 싶다. 나는 웹툰 만화작가를 꿈꾸는 학생들에게 행복한 동반자가 되려 한다.